오래된 어느 가을날 일입니다.
고향 친구 동생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사고가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30대 중반인 젊은 친구라 가족들 슬픔이 말할 수 없었지요.
죽음 앞에 나이 적고 많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만
아무튼 유족들 통곡소리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 한 동네서 자란 후배는 서울에서 활어 사업을 했는데
수산시장 지하에 가게를 크게 차려 놓고 완도와, 제주, 통영 등지에서
농어, 넙치, 우럭을 가져와 대형 수조에 넣어 두고
도·소매업을 했습니다. 물고기 수송하는 짐차가 여러 대 있었고
직원들은 분주히 움직였지요.
후배는 싱싱한 물건이 들어오는 날이면 날 불러 갓 잡아 올린
넙치와 조피볼락 맛을 보여주곤 했는데 사소한 것도 나눠먹는 정 많은 사람
이었습니다. 그런 친구가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다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부탁했습니다.
자신들은 지금 경황이 없어 누구 만날 상황이 아니니 내가 가족을 대신하여
가해자측과 좀 만나 달라고...
그러나 선뜻 내키지 않았습니다.
생때 같은 젊은이가 비명에 세상 뜬 사건인데 나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크든 작든, 송사는 과정이 복잡하고 피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친구와 유가족의 간곡한 부탁을 딱 잘라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가해자쪽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내가 할 일은 유가족 입장을 그쪽에
충실히 전해주면 되는 것이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요. 가해 운전자는
이미 구속되어 있어 협상 창구는 그쪽 변호사였습니다.
그날 변호사 사무실에서 가해자쪽과 만나기로 하고 시외버스를 탔습니다.
-내가 무슨 일로 서울 근교에 며칠 머물고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데 무선호출기(삐삐)가 울렸습니다.
-당시 나는 휴대전화기가 없었습니다-
발신번호를 보니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으로 그는 내가 출발한 것을 알고 있었지요.
무슨 일일까? 급하게 통화할 일이 생긴것 같습니다.
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 보고 있을 때
앞좌석에서 어떤 남자가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몇번 망설이다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실례합니다. 급한 일로 그러는데요. 미안하지만 전화기 좀 쓸 수 있을까요?"
부탁을 하니 긴팔 셔츠에 모자를 푹 눌러 쓴 중년사내가 마뜩찮은 눈으로 나를
바라 봅니다.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가 전화기 쥔 손을 펴 내 앞에
천천히 내밀었어요.
"고맙습니다. 한 통화만 할게요"
인사 하고 전화기를 받으려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세개 뿐이었으며 나머지 두개 또한 손마디가 떨어져 나가
첫눈에 대풍창大風瘡(나병) 환자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당황한 내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며 탄식같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사내는 무서운 얼굴로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봅니다.
"젊은이 어쩔셈인가. 문둥병 균이 득실거리는 이 물건을 받을텐가 말텐가?"
나는 등골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당황해하고 있었지요.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사내가 금방이라도 전화기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불같이 화를 낼 것 같은 기세였습니다. 마음 같아선,
"선생님 대단히 죄송한데요. 전화기 다음에 쓰면 안될까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전화기 받지 않으면 평생
죄책감으로
괴로워할텐데... 나는 그의 손에서 전화기를 받아 송화구에 입을 댄 다음 통화를
시작했지요. 사내는 그제서야 얼굴이 펴지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전화기를 받은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첫째, 내가 먼저 물건을 빌려 달라 부탁했으며
둘째, 나는 여러 사람 앞에서 그의 명예를 손상시킬 아무런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건을 받은 진짜 이유는 그와 내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였지요.
그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별 이상 없는 것으로 봐 균이 내 몸 속에 들어온
것
같지 않습니다. 나 같은 경우 지극히 당연한 일을 했는데요. 살다보면 가끔 뜻하지 않은
곤란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 오더라도 꼼수 부리지 말고 인간에
대한 근본을 지킨다면 나와 타인 모두의 명예를 간직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